[Teentop 니엘x천지 팬북 Blue spring 선입금 통판]
*너무 예쁜 인포페이지랑 표지는 제 인생존잘 벨님이 작업해주셨답니다♡>///<♡*
85p / 떡제본 / 8000원 (+배송비 3000원)
선입금 특전 - 컬러전차스 2종
기업은행 142-130058-01-017 ㅇㅇㅈ
*반드시 입금 후 폼 작성 부탁드립니다*
통판 폼 - http://naver.me/F3PKUYKm
Blue spring 샘플
도시를 둘러싼 몽환적인 풍경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바뀌어갔다. 피리어의 자랑, 자유도시의 공공재. 그들이 가장 아끼는 바다의 낙조는 오늘처럼 먼바다에 옅게 안개가 끼어있을 때면 그 비현실성이 더욱 배가된다. 말간 푸른색에 어느샌가 주홍빛이 스며들고, 해안선의 반대편인 도시 너머의 산마루부터 차차 보랏빛이 차올라 어스름한 분홍빛 안개속에 발그스레한 해가 경계를 흐리며 잠겨들 때 부터, 새빨간 바다 아래로 해가 묻히며 꼬리처럼 남겨진 따스함마저 이미 별이 켜켜이 쌓이고 있는 산의 어둠에 먹힐 때 까지. 평소 구름한점 없이 맑은 바다에서의 낙조 또한 깔끔하고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희소성이라는 것이 끼어들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아끼게 되기 마련이라, 피리어의 사람들은 오히려 약간 흐린 날의 하늘을 더 좋아한다.
오늘도 어둠은 느즈막히 찾아들었다. 자유도시이자 항구도시인 피리어는 밤과 낮의 구분이 명확하면서도 명확하지 않다.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환히 밝혀진 골목골목과 소란스러움은 낮과 같지만, 그 주체는 완전히 다르다. 아니, 낮에는 드러내놓고 섞일 수 없는 자들이 섞여들어오며 피리어는 낮보다 더욱 방종해진다.
해적들이 입항하는 것이다.
본래 해적은 공공의 적으로, 제국령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육지든 해상이든 규모가 크든 작든 해적이라면 무조건 교수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피리어는 제국령이지만 제국령이 아닌, 이른바 독립된 도시로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공공의 적인 해적을 배척하지만, 해적기를 내리고 입항하면 제재를 가하지 않을뿐더러 노획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것도 묵인한다. 심지어 수배령이 내려진 해적단의 수장이 대낮에 광장을 걸어도 그가 행패를 부리지 않는 한 치안대는 그를 체포하지 않는다. 단, 현상금 사냥꾼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그 자신들의 몫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수의 해적들에게도 피리어는 지상낙원이다. 소위 무법지대로 통하는 해적들의 섬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난장판. 그런 아수라장을 즐기는 해적이 있는 반면 어느정도 절도가 있고 통제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해적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해적은 해적이라, 자유의 범위가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넓다. 말썽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수가 없어서 자유도시 피리어는 오히려 제국의 수도보다도 치안대의 수가 많고 특히나 밤에 치안 유지가 철저하다.
매일 밤, 피리어의 주점은 해적들로 가득 차 흥청거린다. 그것은 항구의 동쪽 끝, 상업지구를 조금 벗어나 있어 소란스러움이 덜하고 그에따라 닿는 빛도 옅어져 다소 어둑한 골목에 위치해 있는 종려나무 여관의 1층 주점도 마찬가지다.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크로커스 해적단은 여러모로 이상한 해적단이다. 물론 무법자인 해적들의 특성상 서로 교류가 있을리 없으며 룰을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룰이다. 망루에 거꾸로 매달려서 망을 보거나 태풍이 있을때만 항해를 하거나 헤엄을 쳐서 서대륙까지 간다는 미친놈이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허나 마주치면 약탈하는 것은 해적의 생리상 당연한 일이고 그 과정에서의 폭력이란 필수 불가결한 일일진대, 그 일련의 과정을 나름대로의 룰을 정해 한정해버리는 단장 때문에 크로커스 해적단에게는 이른바 이상한 해적단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보통은 다른 해적단을 털며, 여객선은 손대지 않는다. 상선이나 군함을 습격하더라도 여자와 어린아이가 있으면 물러난다. 약탈은 최대 8할만. 식량에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 등등, 해적 주제에 같잖은 신사도를 갖다붙였다며 비웃는 사람들이 많지만 크로커스 해적단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크로커스 해적단의 단장이 과거 제국의 함대를 이끌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적단의 간부들도 반수 이상이 그가 바다로 나와 해적단을 만들 때 해군에서 함께 빠져나온 이들이었다. 제국의 제1항구인 페젤이 불타던 날, 그들은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목표를 가진 반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신 제국과 해적을 동시에 증오하는 해적을 선택했다.
제국의 해군에는 아직도 그때의 총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크로커스 해적단은 제국의 공적임에도 불구하고 해군에게 예우받는다. 사실, 정말 이상한 해적단이 아닐 수 없다.
타악-
"와호오오!!"
"역시 우리 일등항해사가 최고라니까!"
"이런 제기랄!"
"욕 그만 하고 돈이나 내놔! 하하!"
깔끔하게 과녁 정 중앙에 꽂힌 단검, 그리고 방금 전 그 칼자루 끝에 또 정확하게 꽂힌 단검에 주점 안은 환호와 절규가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판돈이 크지는 않았으나 잃으면 억울한 정도는 된다. 그래도 설마, 가만히 서서도 아니고 뒤로 덤블링을 하며 던진 단검이 정확히 칼자루 끝에 가 박힐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크로커스 해적단에서 가장 빠른 스밀락스호의 일등항해사, 다니엘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무로 지어진 여관은 거세지 않은 해풍에도 오래 시달려 안의 사람들의 소란에 곧잘 삐걱삐걱 흔들린다. 골조가 위태위태 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어쩌면 지어질 때 부터 허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여태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신기할 정도인데 단골 주당들은 그저 밤에는 나무가 술을 마셔 휘청이는 것 뿐, 낮에는 또 멀쩡하다고 주장한다.
밤의 주점은 일그러져있다. 온종일 바다에 시달린 뱃사람들의 시큼함과 비린내. 벽과 바닥에 쏟아지는 술과 그 위를 두들기는 웃음소리, 고함,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 그 사이사이를 천장에 매달린 등불의 빛이 파고든다. 그나마도 자리가 잘 나지 않아 주점 안은 어둑어둑했다.
다니엘은 맥주 거품이 흘러넘치는 잔을 받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환호에 응하며 과녁에 꽂힌 단검을 잡아 뽑았다. 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머리칼에 주홍색 불빛이 어른거린다.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슬며시 성인 남성의 윤곽이 엿보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소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다니엘의 얼굴에, 돈을 잃어 괜히 심통이 난 남자가 시비를 걸어온다.
"어이! 다니엘이라고 했나? 거시기에 털도 안난 꼬맹이가 일등항해사라니, 선장한테 뒤라도 대주나보지?"
아무리 어리다지만 크로커스 해적단의 일원, 심지어 일등항해사다. 아직 덜 취해있는 남자의 일행이 손사래를 치며 남자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만취한 남자는 심신미약상태 답게 시부려도 될 말인지 안될 말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그에게 뭐라고 대꾸하는 대신 도톰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인상을 찡그리며 옆에 앉아있던 선장에게 말했다.
"루크 아저씨, 어떻게 생각해요?"
"네 아빠가 크로커스라 스밀락스의 일등항해사가 됐다는 소릴 듣는게 낫냐, 나랑 붙어먹어서 일등항해사 자릴 꿰찼다는 소릴 듣는게 낫냐?"
"차라리 전자가 낫겠네요."
"어이! 이보쇼! 들었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을 들어야 할 남자는 슬그머니 테이블에서 일어나다 말고 안색이 허얘져서는 재촉하는 일행과 섞여 허겁지겁 여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루크 선장은 어깨를 으쓱였고, 다니엘은 죽어라고 웃는 해적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너무 흔히 있는 시비라 새로울 것도 없다. 어쨌든 다니엘은 일등항해사로서 해적단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의 능력은 같은 해적단원들에게는 익히 검증되어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니엘은 반쯤 남은 맥주잔을 테이블에 팽개치듯 내려놓고, 말없이 여관을 빠져나갔다. 술과 담배에 찌든 퀴퀴한 공간에서 나오자마자 항구의 짠내가 훅 덮쳐든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취해 어질어질 하던 것이 단번에 깨는 기분이었다. 피리어의 건물들은 모두 비탈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골목이라고 해도 거의 모든 곳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많이 파먹힌 달이 덩그마니 떠있는 밤의 바다는 피리어의 소란스러움에도 아랑곳 않는 듯 고요하다. 달이 그리 밝지 않아 오히려 별빛이 찌를 듯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다니엘은 신경질적으로 푸 푸 한숨을 쉬며 산책 겸 동쪽 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피리어에 입항한지 닷새째. 처음엔 피리어의 자유분방함에 반해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쏘다녔지만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동쪽의 숲은 출입금지, 서쪽은 절벽이라 육로로는 어디도 갈 수 없는데다 생각보다 도시가 작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풀이 팍 죽어버렸다.
제국의 지도에 정식으로 표기되기 시작한지 불과 백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도시인 피리어는 해신의 축복을 받은 도시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에 날씨는 항상 맑고, 근처 다른 항구도시는 매년 태풍에 의해 난리가 나는데도 피리어는 도시가 생긴 이래 태풍은 커녕 큰 비에 의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근방의 바다는 항상 평온해 배가 난파되는 일이 없다. 오히려 너무 바람이 없어 범선은 움직이기 힘들 정도다. 단점이라면 육로가 차단되어있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근처 항구도시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해로만으로도 충분히 물자를 운반할 수 있고, 관세가 없는 자유도시다보니 상인들이 몰려들어 물자는 모자람 없이 항상 넘쳐났다.
산등성이를 따라 설계된 도시는 항구 가까운 쪽은 상업지구로 이루어져 있고 올라갈수록 주거지구와 귀족들의 별장이 있는 고급 저택이 늘어선다. 그리고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는 도시가 생긴 이래 대대로 피리어를 통치하고 있는, 아르메리아 공작가의 (궁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저택이 세워져 있다. 잿빛 절벽 사이의 쨍한 파랑색 지붕이라 바다 멀리서도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또한 밤에는 저택의 중앙탑에 횃불을 밝혀놓아, 등대의 역할을 하게 했다. 밤에도 상업지구는 환하지만 주거지구로 갈수록 어둠이 깊어지고, 공작가의 저택마저 잠겼다가 산꼭대기의 탑만이 다시 불탄다.
다니엘은 그 탑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이번 항해중 손상된 선체의 수복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데, 심지어 스밀락스호에 사용된 나무는 희귀한 나무라 이 자유도시에서도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완벽하게 수리하기 위해서는 두달 뒤 도착하는 상선을 기다렸다가 목재를 받아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배 위에서 머물러있는 시간이 더 길다보니 육지멀미를 한다는 해적단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렸을때부터 빨빨거리고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다니엘 또한 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대충 수리했다가 크로커스 단장에게 쥐어 터지는 것은 루크 선장이었고, 때문에 루크는 모든 불만을 묵살해버리고 목재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달이라니! 다니엘은 절대 결코 이 좁은 피리어에서 죽치고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주쯤 눈치봐서 내륙으로 튀었다가 두달 뒤에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일등 항해사가 가진 책임따위는 다니엘의 갑갑함 앞에서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질 못한다. 어차피 바뀐것은 직책뿐 해적단 내에서 도련님 혹은 옆집 조카 취급 받는 것은 똑같다. 이제 다 컸으니 엉덩이는 때리지 못할테고,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날리려 할테지만 그건 두달 뒤 걱정할 일이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심심함을 못이긴 자신이 출입엄금이며 침입시 즉각 사형이라는 동쪽숲에라도 들어...
"아,"
들어가면 되잖아?
*
다니엘은 골목이 끝나는 지점의 모퉁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초들의 동태를 살폈다. 숲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중앙 광장에서 숲 안쪽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있는데, 그 길은 평소에는 막혀있다. 그 길을 제하면 들어가는 곳은 일절 없고 모든 숲의 경계에는 넘을 엄두도 나지 않는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담이 끝나는 지점은 공작의 저택과 해안절벽인데, 담 중간중간과 절벽 끝에는 초소가 따로 있어 치안대가 밤낮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짐작컨대 아마 숲 안에도 보초가 있을 터였다.
사실 아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발각 즉시 사형이라는, 유례없이 악독한 출입금지 지역인 주제에 공지된 이유는 해신을 모신 신전이 있다는 것 뿐. 헌데 불편하게도 제국으로 통하는 육로를 아예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숲에 대해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신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나 경비가 삼엄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피리어의 주민에게 물어도, 글쎄에, 하며 말을 흐리거나 외지인들 사이에서 슬렁슬렁 흘러다니는 소문 비슷한 것만 내놓을 뿐이다. 신전에 모셔진 성물은 가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더라, 그 성물 덕분에 피리어에 재해가 없고 풍요로운 것이라더라, 사실은 신전이 있는것이 아니라 공작가의 혹은 제국의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더라. 등등. 그것만으로도 다니엘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데에는 손색이 없었으나 루크 선장은 그렇게 엄격하게 금지된 곳에 발을 들여놓아봤자 좋은 꼴 볼일이 있을리 없다며, 괜히 말썽부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다니엘의 귀를 잡아 끌었다.
다니엘은 기특하게도 루크 선장의 말을 새겨듣고 동쪽 숲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돛대를 수직으로 뛰어 올라가는 다니엘에게 높은 담장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는 아마도 월담 후가 되겠지. 평소의 이성적이고 호기심 왕성한 다니엘이었다면 혹여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며칠 동태를 살피거나 최대한 정보를 모은 뒤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성은 가벼운 술기운과 곧 폭발할 것 같은 권태로 날아가 버렸고 남은 것은 호기심과 호승심 뿐이었다.
담이 높은데다가 언덕 위쪽이라 시야가 훤히 뚫려있었으므로 초소에서는 접근하는 사람이 잘 보인다. 아무리 이성이 좀 날아간 상태라 하더라도 자살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 보초가 빤히 보는 앞에서 담을 넘는 기행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다니엘은 담에 면한 집의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 납작 엎드렸다. 각 초소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고 거리도 꽤 있었기 때문에 보초들의 움직임은 아주 잘 보였다. 길게 관찰하고 패턴을 분석할 시간과 여유는 없다. 심지어 다니엘이 대강 훑어본 결과 보초들은 높다란 담을 믿고 있는지 그리 경계에 철저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은 아니었다. 다니엘에게는 천만 다행한 일이다.
지붕 위에서 내려온 다니엘은 담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는 보초 하나를 멀리서 눈으로 쫓았다. 담 중간에서 맞은편에서 오던 다른 보초와 마주쳐 몇마디 나눈 그 보초는 이제 자신의 초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보초는 그 자리에 조금 더 서있다가, 그 또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그때, 다니엘은 몸을 낮춘 채 쏜살같이 내달았다.
ㅡ탁,
"...후,"
순식간에 담 밑에 이르러 한번의 도약과 한번의 디딤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담을 넘은 다니엘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담 너머에 착지했다. 담을 넘는 과정에서 조금의 소음도 없었음에 만족한 다니엘은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검은 숲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뭐가 있는지 볼까."
*
투명한 연두빛 잔디와 손질된 정원수들, 사시사철 지는 일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이 가득한 정원을 가로지르며 놓여진 새하얀 대리석에 봄의 햇살이 쏟아진다. 그 대리석을 가볍게 딛고 가는 하얀 발이 있다. 언제 햇빛을 보기는 하였을까. 투명하게 빛나는 발등은 대리석보다도 하얬고, 진주처럼 광채가 흘렀다. 걸음걸음 옮길 때 마다 발등으로 부드러운 천이 쏟아진다.
얇은 천으로 지어진 키톤을 입은 채 정원석 위를 사뿐사뿐 걷고 있는 이는 성년에 가까운 소년이었다. 투명한 숄을 두른 어깨는 벌써 성인 남성마냥 각이 졌으며 벌써 목젖이 두드러졌으나 납작한 허리와 낭창하게 떨어지는 하체의 얇은 선은 아직 무른 아이같다. 가볍게 딛는 걸음에 따라 팔랑팔랑 흔들리는 가는 팔 또한 발등만큼이나 하얗다. 개구장이처럼 뒤통수가 붕 떴지만 결이 좋은 연분홍빛 머리칼과 크고 동그란 갈색 눈, 소년 본인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 만큼이나 높게 솟은 코, 장밋빛 뺨과 얇고 작은 입술. 세상 괴로운 일이라고는 조금만치도 알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 티 하나 없이 밝은 얼굴. 미처 성숙하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듯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찬희님, 볕에 오래 나가계시면 안됩니다."
"나 방금 나왔어!"
뒤따르던 어린 시종의 말에 찬희라 불린 소년이 입을 딱 벌리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찬희의 항의는 정당한 것이었다. 말그대로 정말 복도의 그늘을 벗어나 몇걸음 뛰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재차 찬희를 나무란다.
"품위없이 큰 소리를 내시면 안된다고 제사장님께서..."
"아, 알았어 알았어."
찬희는 투덜거리며 다시 저택의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소리내어 불만을 말하는 것도 이른바 '품위없는' 행동에 해당되지만, 끝도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시종의 입장에서도 정도라는 것이 있어서. 덜렁거리는 버릇이라거나 자주 토라지는 성격 등에 대해서는 포기한 상태이다. 모쪼록 찬희가 이 저택에서 어려워하는 사람은 제사장 단 한사람 뿐이고 그 제사장이 언급한 부분 외의 사항은 무엇이든 찬희 마음대로다. 시종이 잔소리를 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면 그만. 다만 이후 제사장에게 듣는 꾸지람이 무섭기 때문에 듣는 척 정도는 해주는 편이다.
찬희는 10살때 부터 그렇게 자라왔다. 10살 이전에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찬희에게는 어머니가 없었고 아버지도 없었다. 하지만 고아라고 하기엔 유복하게 자랐다.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찬희의 유모는 친어머니처럼 찬희를 사랑해주었다. 열살 이전에 살던 저택에서도 찬희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다만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뿐. 그리고 열살이 되던 해, 살던 곳이 옮겨졌다.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된 곳으로.
옮겨온 저택에서 찬희는 더욱 곱게 키워졌다. 책이라고는 일절 없었고 찬희를 귀찮게 하던 역사와 수학 등을 가르치던 가정교사도 없었다. 대신 춤과 노래를 배웠다. 그마저도 찬희가 수업을 듣기 싫을 때엔 듣지 않아도 되었다. 전에 있었던 곳처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나무에 오르거나 맨발로 흙을 밟는 것이 금지되었다. 찬희의 몸에는 자그마한 상처도 나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찬희가 아주 어렸을 적 생긴 볼의 상처를 볼 때 마다 무섭게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야 한다며, 그냥 걷다가 넘어지기만 해도 시종이 채찍질을 당했다.
찬희는 얇은 유리세공품보다도 더 조심스레 다루어졌다. 그냥 두어도 아름답건만 매일 몸의 선을 위해 안마를 받았고 장미수로 목욕을 하고 전신에 향유를 발랐다. 이 저택의 모두가 찬희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지만, 예외라면 아름다움의 유지를 위한 관리였다. 산책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양산을 썼으며 피부에 좋은 것들만을 먹어야 했고, 취침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이 모든것은,
찬희가 모실 해신을 위해.
"빨리 뵈었으면 좋겠어. 바닷속에 계신다지? 지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에."
"2년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전 사제분들보다 찬희님께서 월등히 아름다우시니, 해신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겠지요."
"내가 제일 예쁘대?"
"예. 제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찬희는 뿌듯한 듯 활짝 웃었다. 빈말이 아닐 것이다. 찬희는 빈말이라는 것을 모른다. 찬희에게 자신이 예쁘다는 것은 굳은 사실이고,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해신의 제단에 저녁 문안인사를 올린 찬희는 숲 너머로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별채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찬희의 뒤로는 시동과 호위병이 각 한명씩 붙어 따라간다. 찬희는 어렸을 때 부터 시동과 호위병이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는 찬희와 누군가가 단 둘이 있는 일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시동과 호위병 두명이 붙어다녔는데, 결국 찬희가 제일 무서워하는 제사장을 상대로 오랫동안 투쟁한 끝에 찬희가 부르지 않는 이상 찬희의 방에까지는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전까지는 일정이 없다. 찬희는 지긋지긋한 감시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방문을 닫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쓰잘데기없이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는 양쪽으로 복도가 나 있다. 진주로 된 발이 쳐져 있는 왼쪽 복도를 통과하면 그곳이 찬희의 침실이다. 침실이라고는 해도 춤을 춰도 될 정도로 넓어서, 지금은 익숙해졌다지만 어렸을 적에는 혼자 잠들지 못했었다. 대리석 바닥에 발과 천이 스치는 소리를 제하면 방 안은 고요했다. 그 흐르는 듯한 침묵 사이로 절벽쪽으로 크게 나 있는 창 밖에서 물소리가 스며온다. 찬희는 엷게 콧노래를 부르며 창가로 향했다.
사시사철 따스한 기온을 유지하는 피리어의 날씨 덕에 창문은 거의 항상 열어놓을 수 있었다. 찬희는 이 저택을 통털어 침실의 창문을 가장 좋아했다. 유일하게 탁 트여있는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창 밖으로는 바로 수직 절벽이라 창은 다소 높게 나 있었지만 찬희는 아랑곳않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시종이나 호위병이 보았다면 경을 칠 일이다. 하지만 없으니까 상관없지. 찬희는 코끝으로 웃으며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아 살풋 눈을 감았다.
창 밖에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만이 펼쳐져 있다. 자연적으로 침식되어 생긴 것이 아니라 해안절벽지대 안쪽이 쑥 꺼져버린 듯 기형적인 만이었다. 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절벽 사이의 작은 해안아치이지만 사방이 절벽이라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또한 찬희가 있는 곳에서도 바깥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찬희는 수평선이라는 것을 모른다. 바다도 알지 못한다. 맞은편 절벽 너머에 바다가 있고 그곳에 해신이 산다는 것은 알지만 이 만에 들어찬 물 이상으로 더 많은 물이 어떤 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에, 찬희는 이 창밖의 풍경을 사랑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절벽, 그 위로 펼쳐지는 물빛 하늘, 비껴 내리쬐는 햇빛. 이 시간은, 이 공간은 온전히 찬희의 것이다.
-툭
갑자기 들려온,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에 찬희는 눈을 반짝 떴다. 방 안쪽에서 들려온 것은 아니다. 절벽 밑으로 돌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헌데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릴 이유가 있을까? 찬희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살짝 빼어 창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흡,"
찬희는 순식간에 입이 막혀 방 안쪽으로 떨어졌다. 전신으로 물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부유감이 든 순간 등의 충격을 예상하고 눈을 꾹 감았으나 찬희의 입을 틀어막은 괴한은 창틀에서 찬희를 낚아채며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찬희를 안은채로 소리없이 방 안에 착지했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의 감촉과 하체를 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찬희는 조심조심 눈을 떴다.
그는 찬희보다 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찬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같기도 하고, 사슴같기도 하고, 강아지같기도 한 눈이라고.
찬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전 전차스 실물 공개>_<
너무너무 예뿌고 귀여운 인스타ver 명함은 벨님이 작업해주셨습니다 꺄ㅠ0ㅠ0ㅠ0ㅠ0ㅠ♡♡♡♡♡♡
'공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21일 팬미팅 녤천스티커 나눔^-^)9 (0) | 2016.08.15 |
---|---|
스티커 무료나눔(종료) (0) | 2016.02.22 |
2월 로플 C-01 트리플 크라운으로 참여합니다>_< (0) | 2016.01.26 |
조팝의 취향 및 이용방법 (0)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