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 01:48
글
만우절 날 절대 하지 말아야 될 것, 첫번째.
고백하기.
[녤천/캡쫑] 만우절, 그리고...
"죽어버릴래!"
햇볕이 쨍하니 내리쬐는 말간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이 화단 위로 날카롭게 울렸다. 학교 뒤꼍의 자그마한 화단은 오로지 원예부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최종현이 내지른 그 비명을 들을 사람은 나머지 원예부원인 이찬희와 안다니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종현은 마음 놓고 다시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나 말 더듬었겠지? 얼굴도 빨개졌겠지? 완전 농담 안 같았겠지? 그치?"
"진정해 최종현. 어차피 좆된거 깊게 생각하지는 마라."
나무그늘 아래의 풀밭에 스티로폴박스 뚜껑을 놓고 앉아있던 이찬희가 귀찮은 듯 여상한 말투로 핀잔했다. 4월 1일. 전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거짓말만 하는 날. 오늘 내뱉는 말은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라고, 관습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용서가 되고, 다음날이면 어제 했던 말은 공중으로 사라진 채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한번 들은 말을, 특히나 평소에 들었다면 가슴에 꽂히고도 남아 평생 잊지 못할 말을 원래 그런 날이니까, 하며 흘려내버릴 수는 없었다. 나쁜 말도 그렇고, 좋은 말도 그렇다. 그리고 그놈의 사랑, 사랑이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관습적 불문율이 있었으니 바로,
'만우절에는 고백하지 않는다.'
였다.
그런데 최종현은 그 불문율을 어겼다. 불과 10분 전 일이었다.
"그러길래 만우절 농담을 하려면 딱봐도 농담같은 농담을 해야지. 네가 민수 형 좋아하는 거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내, 내가 언제 그렇게 티를 냈어!"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매순간."
1학년 최종현이 3학년 방민수에게 홀딱 빠져서 갓 태어난 새끼멍멍이마냥 방민수 뒤를 쫄쫄 쫓아다닌다는 것은 실로 유명했다. 전교에서 딱 두사람만 그걸 몰랐다. 최종현과 방민수. 최종현은 태생이 멍청해서 몰랐고, 방민수는 원래 천지만물에 모두 두루두루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만우절에 농담처럼 고백을 하자는 멍청한 생각은 오로지 최종현 홀로 생각한 거였다. 하다못해 1분전에 유창현에게라도 미리 말했다면 머리털을 다 잡아 뜯어서라도 말려놨을거다.
'형,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참 짧은 말이다. 정말 농담이였다면 씩 웃으면서 툭 던져도 될 말이었다. 최종현은 그렇게 쉽게 말하려고 했다. 가볍게 내뱉어서, 방민수가 픽 웃으며 그래 알았다. 라고 넘어가주면 만우절 농담을 빙자해 물흐르듯 고백하는 일은 성공이었다. 만우절이고, 허공으로 날아갈 말이었다. 어차피 평소에는 곧죽어도 못할 말이니까.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 그냥 한번은 말해보고 싶어서.
그 절호의 기회가 왜 망했냐 하면, 일단 최종현이 방민수 한정으로 너무나도 쫄보가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평소에도 말한번 붙이려면 귀까지 빨개져야 하는데. 만우절이라고 다를까. 당연히 떨었고, 당연히 말을 더듬었고, 당연히 얼굴은 목까지 붉어졌다. 그래도 그것까진 괜찮았다. 방민수가 웃어넘기면 모든 것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민수는 웃지 않았다. 최종현이 약 5분에 걸쳐 간신히 내뱉은 그 짤막한 말을 앞에 두고 방민수의 표정은 무표정에서, 거의 경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방민수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농담을 하며 웃기야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무표정이고, 최종현에게도 무관심이었다. 그런 방민수의 표정이 확 구겨지자 최종현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뭐라고 변명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너는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냐? 예를 들어 봐. 내가... 그러니까... 야 안다니엘! 예전부터 좋아했다! 나랑 사귀자! 하면 안다니엘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어...?"
갑자기, 싸늘한 침묵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초가 흐른 뒤에야 최종현이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농담이지?"
"아 씨발 당연하지 씹새야!"
오늘이 무슨날이라고? 어! 대답안해! 이찬희는 맹하기 그지없는 최종현의 대답에 벌컥 짜증을 내며 깔고앉았던 스티로폴박스 뚜껑으로 최종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스티로폴 박스는 두동강이 났고, 하얗게 날리는 스티로폴 부스러기 사이로 이찬희의 짜증이 한번 더 솟는다.
"넌 뭘또 쪼개 안다니엘!"
"흠... 생각해볼게."
"뭐?"
"사귀자며. 생각해본다고."
아니 그런데 진짜 이새끼들이 쌍으로. 이찬희는 빙글빙글 웃는 안다니엘의 얼굴에 반 남은 스티로폴 박스 뚜껑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점심시간의 끝을 알렸다.
*
"그런데 보통 생각해 볼게, 라는 말은 너 좀 별로, 라는 말이랑 같은 말 아니냐?"
"보통 그냥 희망고문 해본 다음에 결국 차는데 써먹는 말이지."
"씨발 그럼 내가 농담으로 고백하고 농담으로 차였다는 말이잖아. 뒤질래?"
니가 감히 나를 차? 이찬희는 들고있던 모종삽 자루를 허공에 휘둘렀다. 흩뿌려지는 흙을 피해 안다니엘은 낄낄 웃으며 뒷걸음질 쳤고, 비싼 꽃모종 하나를 밟아버렸다.
원예부는 참으로 방과후에도 할일이 드럽게 없는 불쌍한 인생들의 모임이다. 학교에서 쓰잘데기 없이 부활동을 필수 교과과정으로 넣어놓는 바람에 할일 없고 하고싶은 일 없던 이찬희는 별일 안하는 부를 고르고 고르다 결국 인원수가 모자라서 폐부되기 직전인 원예부로 떨어져버렸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원예부는 정말 할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어쩌다보니 3학년때까지 부활동을 했고, 어쩌다보니 부장까지 맡았다. -3학년이 이찬희 하나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있던 3학년 선배들이 우르르 졸업하고 나니 남은 부원은 이찬희 뿐이었다. 운동부를 하고싶어했던 신입생 최종현을 어렸을때부터 알던 동네 형의 지위를 이용해 협박 반 부탁 반으로 원예부에 넣어놓은 것까진 좋았는데, 한명이 더 필요했다. 그때 어디선가 슬그머니 들어와 입부신청서를 내민 것이 바로 안다니엘이었다.
안다니엘은 원래 밴드부 보컬이었다. 작년, 1학년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밴드부 메인보컬로 학교축제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늘씬길쭉한 몸과 섹시한 망둥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왜 선망의 대상인 밴드부 메인보컬 자리를 버리고 내버려두면 폐부될 원예부의 일개 부원으로 들어왔는가. 다니엘의 말에 따르면 시끄러운게 싫어서, 의 이유였다고. 선뜻 수긍하기는 힘든 이유였지만 이찬희는 그러려니 했다.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는가. 학기초부터 일관되게 시건방진 태도는 영 짜증났지만 이찬희 또한 선배후배사이에 그리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라 그냥 가끔가다 한대씩 패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하고는 했다.
"아직 찬건 아니지. 말그대로, 생각해 보겠다고 했잖아?"
"지랄 잘 한다. 내가 너한테, 어? 생각 해봐야 될 급이냐? 아이쿠 감사합니다 해도 모자랄판에... 아 그런데 최종현 이새끼는 왜 아직도 안와?"
오늘 심을 상추씨앗 구매담당이 최종현이었다. 내일부터 며칠 내내 비소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심지 못하면 일지 작성에 작은 불편사항이 생긴다. 이찬희는 자리를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이 새끼 분명 교실에 혼자 남아서 질질 짜고있을거라며, 이찬희는 결코 위로의 목적은 아닐 듯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꺾인 꽃모종 줄기를 어떻게든 세워보려고 노력하던 안다니엘도 장갑을 벗어던지고 이찬희 뒤를 쫑쫑 쫓아간다.
*
"와, 대박."
"쉿, 쉿!"
분명, 최종현은 교실 안에서 질질 짜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는 아니었다. 자꾸만 목을 빼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려는 안다니엘의 소매를 잡아 끌며 이찬희는 교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거짓말 아니지?
-아, 아까..도... 거짓,말... 아니, 아니었는데...
-내일 아침에 사실 농담이었어요. 하면 정말 화낸다, 나.
-죄, 죄송해요... 저 진짜... 형, 어엉...
최종현은 훌쩍거리며 말하다 말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듯했다. 방민수의 한숨소리가 들렸고, 최종현의 울음소리는 어디엔가 덮히듯 멈추었다. 아니 미친, 이찬희와 안다니엘은 동시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복도를 빠져나왔다.
"방금 내가 뭘 본거지."
"...게이키스."
"말하지마 아악! 내눈! 씨발!"
이찬희는 전신을 흔들며 비명을 지르다가, 안다니엘이 같이 오도방정 떨어주지 않자 머쓱해져서 괜히 눈치를 본다. 이찬희를 내려다보는 안다니엘의 눈초리가 조금 서늘했다.
"선배, 호모포비아야?"
"아...니이~? 내가 존나 그런거 혐오했으면 최종현이랑 진작에 연 끊었지. 그냥... 나는 걔가 놀이터에 앉아서 흙 주워먹을때부터 알았었단말야."
원래 부모형제 성생활은 목격하면 안되는 프라이버시잖아? 그런 문제라고. 이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안다니엘이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이찬희의 팔을 툭 쳤다.
"그런거가지고 시무룩해지냐. 내가 떡볶이 사줄게, 가자."
"...김말이도 사줘."
"하튼 선배가 돼가지고..."
"니가 언제 선배취급이나 해줬냐?"
이찬희가 씩씩거리며 안다니엘의 팔을 꼬집었다. 가로등이 깜박인다. 이제 석양도 보라빛 밤하늘에 먹혀드는 시간. 골목은 두명분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
[뭐하냐?]
[자야지 뭐해]
[맨날 두시까지 겜하면서 뭘 자]
[왜또 시비야 뒤진다 진짜]
[나와봐]
[뭐래]
[나 지금 너네동 앞 놀이터니까 나와보라고]
미친새끼 아냐? 이찬희는 탁상시계를 한번 쳐다보고, 핸드폰 시계도 한번 쳐다봤다. 11시 55분. 물론 밤이다. 만우절이 5분 남은 시점에서 끝물낚시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본데, 누가 이런거에 속는다고 짜식이... 이찬희는 픽 웃으며 헤드셋을 다시 쓰려고 했다. 그런데 또 메세지가 왔다.
[밖에 내다봐]
이찬희는 화닥닥 창문을 열고 놀이터 쪽을 내다보았다. 씨발... 가로등이 두어개 켜져있는 놀이터 한가운데서 길쭉한 인영이-아무리 봐도 안다니엘일 수 밖에 없는 길이였다- 핸드폰 손전등을 켠 채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냥 산책 겸 여기까지 온건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치기에는 안다니엘이 사는 집이 너무 멀었고, 버스도 끊긴 시간이었다. 이찬희는 메세지에 답장도 않은 채 파자마에 바람막이만 걸쳐입고 헐레벌떡 현관문을 나섰다. 찬희야 어디 나가니! 안방에서 엄마가 외쳤고, 찬희는 편의점에 콜라 사러간다고 빽 소리를 질렀다.
*
곧 비가 올 날씨답게 공기가 습하고 탁했다. 안개가 낀 듯 뿌연 공기가 가로등 빛 속에서 육안으로 보일 만큼 유동하고 있었다. 춥지는 않았다. 큼직한 야구점퍼에 무릎이 드러난 청바지를 입은 안다니엘은 저 멀리서 이찬희가 뛰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그렇게 급하게 나오느라고 그래?" 파자마 차림으로 헐떡거리며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찬희의 정수리에 대고 안다니엘이 웃으며 말했다.
"너 가출했어?"
눈이 동그래진 이찬희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가, 한밤중의 아파트단지에 얼마나 소리가 잘 울리는지를 깨닫고 입을 합 닫았다. 왜 그렇게 급히 내려왔나 했더니,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다니엘은 점퍼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발 끝으로 모래를 툭툭 찼다. 최종현 멍청한 것만 생각하지, 본인 멍청한 것은 생각도 않는다. 이찬희는.
"지금 몇시야."
"어..엉?"
"몇시냐고. 지금."
안다니엘의 재촉에 이찬희는 얼결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깔끔하게도 딱 자정이었다.
"12시 넘었어?"
"딱 12시. 야 너 근데..."
"그럼 2일이네."
"아 뭐라는거야! 너 진짜 무슨일 있어?"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못한 이찬희가 안달을 내며 파닥거린다. 잡아서 앉히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내며 안다니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법 웃긴 상황인것 같은데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 긴장도 했을 것이다. 안할리가 없지. 최종현과 마찬가지로.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려고 했지, 내가."
"어?"
"그런데 나도 농담으로 넘기자니까, 억울하더라고. 무려 이찬희가 먼저 말했는데."
"무..뭐를..."
"야 이찬희. 예전부터 좋아한건 나였거든?"
"야, 야! 너 미쳤, 미쳤어?"
무려 자정이 넘기를 기다려서 하는 말이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럴리가 없었다. 이찬희는 전신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잠시 휘청였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안다니엘이 이찬희의 팔을 잡아 지탱한다. 안다니엘은 이찬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태도조차 아니다. 그냥, 통보하러 온 것이었다. 항의를 들을 생각도 없는, 강경하고 절대적인 통보.
"나랑 사귀자. 생각은 내가 많이 했으니까, 너는 안해도 돼."
이찬희는 망연히 안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지랄한다."
"내가 원래 지랄 잘하잖아."
가로등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안다니엘이 그대로 이찬희를 향해 고개를 숙인 탓이었다.
-끝에디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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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