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녤천]
[엘천녤]
[해이님께 받은 단문♡]
1. 찬희 열두살
******
"……야, 너 껌 있냐."
"이 새끼는 꼭 껌 찾으면서 지가 안 갖고 다니더라."
아, 있어 없어. 다니엘의 재촉에 동기가 결국 껌 하나를 넘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인 다니엘이 아쉬운 손길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저녁 먹고 식후땡은 늘 꿀이라 한 대만 피기가 뭔가 아쉬웠다. 쯧, 껌은 후라보노 레이디지. 기껏 줬더니 손가락에 껌을 끼운 채 달랑거리며 불평까지 한다. 꼬우면 내놔, 자식아. 발끈한 동기가 채 손으로 낚기 전에 입으로 홀랑 넣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뭔 깔끔을 그렇게 떨어?"
"아, 집에 찬희 있을 것 같아."
내 촉이 말하고 있어. 해탈한 얼굴로 먼산만 바라본다. 8년의 경험으로 체득된 일종의 감이었다. 찬희? 그게 누군데? 다니엘 옆의 양 동기들은 웃느라 배꼽이 빠지는데 혼자 알아듣지 못한 동기가 묻는다.
"몰랐냐? 안다니엘 부인 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쳤냐 부인이게?!"
"아, 걔가 부인이면 안다니엘 쇠고랑 차나?"
"득츠르……"
아아, 방금 담배 폈는데 또 담배 말린다. 신난 동기들은 말을 줄일 생각을 안 한다.
"나 처음에 진짜 안다니엘 앤 줄."
"그러기엔 존나 안 닮았지. 걘 예쁘장하드만."
"아 그러니까 누군데 걔가?"
"안다니엘 클럽 간다 그러면 귀신 같이 나타나는 애 있어."
"여자 만날 때도."
그러니까, 대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온 건지 ─분명, 100% 확률로 다니엘의 자취방에 죽치고 있다가 안 오니까 찾아나섰을 거다.─ 다니엘이 유흥을 즐길 만하면 찬희가 나타나는 바람에 산통 다 깨진 경험자들로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한 번은 팀프로젝트로 밤을 샌다고 찬희에게 미리 기가 막히게 연막까지 쳐가며 (안다니엘이 있어야 여자들에게 먹히기 때문에 동기들은 어쩔 수 없이 이 바보 같은 연극에 엄청 열심히 동참했다.) 클럽에 잠입하는 것까지 성공했는데, 새벽 1시에 홍대에 초등학생이 길거리에 떡 버티고 있어서 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때 찬희가 짓고 있던 '니가 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하고 말하는 승리의 미소란. 요즘 초딩이란. 그 이후로 동기들은 절대 절대절대절대 다니엘에게 클럽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것도 벌써 1년 전 일이다.
"하…… 천하의 안다니엘이 어쩌다가……."
덕분에 파토난 썸만 세 개요, 애인만 넷이라. 갑자기 자신이 애잔해진 다니엘이 먼산을 바라보며 묵념했다. 물론 그래서 평생을 못 놀았다는 건 아니지만. ……찬희가 알면 빽 울다가 기절할지도 모르니 건강을 위해 묻어두도록 하자.
"귀엽잖냐. 동생이 오빠 나쁜 길 빠지지 말라고 벌써부터 보호해주고."
"클럽이 나쁜 길이냐?!"
"애들 눈에는 그렇지, 뭐."
"내 여동생이 그러면 귀여울 것 같긴 하더라."
……찬희는 남자거든. 공교롭게도 동기들과 찬희는 모두 밤에 만났기 때문에 얼굴만 대충 기억하는지 멋대로 여동생으로 만들어버린다. 아직 변성기도 안 온데다가 눈은 크고 예쁘게 쌍꺼풀이 졌다. 게다가 입술까지 얇고 윤기 있어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찬희긴 했다.
남자애. 14살 차이. 그런데
날 좋아한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고백한다.
빌라 바로 아래서 한 대만 더 필까, 하다가 씹은 껌이 아까워 애꿎은 돌 한 번 차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가끔 형 좋아하니까!! 하고 당당하게도 말하는 찬희를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 지 헷갈릴 때가 있다. 4살 때 처음 만나 자신이 업어 키우듯 돌보았으니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긴 할 것이다. 찬희는 외동이니 형 같기도 하고, 아빠 같기도, 엄마 같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그 '좋아한다'가,
그런 '좋아한다'가 아니면?
……12살이 뭘 알겠어.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니 형이다-! 하고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찬희가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달려온다. 봐, 있을 줄 알았다. 비번을 바꾸든가 해야지. 0000이 너무 쉬운 것 같아 바꿨더니 어떻게 또 알았대. ─현재 비밀번호 2580─
"너 아줌마한테 또 연락 안드리고 나왔지."
"어차피 아는데 뭐"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담배."
뜨끔한 다니엘이 신발을 벗다말고 멈칫했다. 킁, 한 번 코를 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따라간 찬희가 다니엘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주욱, 훑어올리며 게슴츠레 바라본다.
"……아아, 아까 식당이 흡연 가능한 데였는데 거기서 배였나보다."
"흐응─"
좀 더 다가오자 아이는 고작 자기 허리께를 조금 넘었다. 그런데 압도당하는 이 기분은 뭐지.
"요새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막 손목에 이렇게 니코틴 냄새가 나나봐?"
아차. 아까 향수 안 뿌렸던가. 어디서 열 두살짜리가 니코틴이란 단어를, 손목에 가장 진하게 남는단 사실을 배워왔는지 다니엘의 손목을 낚아채 킁킁거린다. ㅈ…됐다. 다니엘의 얼굴에 황망히 그런 단어가 쓰였다.
"끊었다며!!"
"그게, 어쩌다 보니……"
"그게 끊은 거야?!"
"오늘 딱 한 대 폈……"
"나한테 거짓말 해 왜?!"
"나보다 얼마나 먼저 죽으려고?!"
"찬희,"
"열 네 살이나 많게 태어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빼액, 지른 소리를 끝으로 잠시 방안에 정적이 흐른다. 곧 찬희의 주체하지 못한 시익, 시익, 분 삭히는 소리가 조금 들렸다. 열이 오른 얼굴에 곧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태어나 보니 벌써 다니엘은 지금 제 나이보다도 훨씬 많은 열 넷이었단다. 그러니 다니엘의 초딩시절 따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제 또래였던 다니엘은 가끔 아주머니가 보여주시는 사진 속 모습이 전부였다. 자신만한 키에, 찬희 또래답게 개구지게 웃는 표정.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너무 아까웠다. 무려 14년의 세월을 낭비한 것 같았다. 제 뜻도 아닌데.
다니엘을 처음 보고 8년이 흘렀다. 그 8년도 이리 긴데, 가끔 14년의 차이를 이겨낼 수 있을지 무서웠다. 다니엘은 이제 스물 후반인데 자신은 교복도 못 입는 나이란 게 가끔 서러울 때가 있었다. 얼마나 어리게만 보일까. 얼마나 동생처럼만 보일까. 왜 하필 14살이나 차이가 났어야 했을까. 다니엘은 자신보다 훨씬 먼저 30대를 맞이할 거고, 40대를 맞이할 테였다. 그러다 보면, 아마 시작이 이만큼 차이난 것처럼 끝도 그만큼 차이날 지도 모른다.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태어났을 때 손해봤으면 됐지, 또 손해를 보라니. 적어도 끝 정도는 찬희에게 맞춰주면 안되나.
"일찍 죽지마아─……."
이렇게 간절한 고백이 또 어디 있을까. 제 품에 와락 안기어 서럽게도 우는 아이를, 한껏 허리를 숙여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어휴, 웃음기가 서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다니엘은 담배를 끊었다.
*******
2. 찬희 열일곱, 다니엘 서른 하나즈음에 이러지도 않았을까 해서
"……담배."
"뭐?"
다니엘이 뜬금없는 소리에 조수석의 찬희를 흘끔, 쳐다보았다. 야근을 끝냈더니 찬희 야자가 끝날 시간이라 같이 가기로 했다. 다니엘과 찬희의 어머니는 오늘 아침 동창 모임으로 무려 3박 4일의 세부 여행을 떠났다. 하여튼 여전히 잘 놀러다니신다. 그 덕분에 찬희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웃었다. 내가 10만원에 눈이 멀어……미쳤지, 미쳤어. 다니엘과 같이 갈 생각에 찬희는 신이 나서 야자 2교시를 그대로 말아먹었다고 히, 웃으며 자랑했다. 자랑이냐, 그게? 하고 꿀밤을 꽁, 하고 먹였더니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창틀에 팔을 기대고 다니엘이 운전하는 폼을 하나 하나 지그시 바라보다가 대뜸 한다는 말이 '담배'란다. 이상하다. 냄새나나? 차에서 누가 핀 적도 없는데.
"끊은 지가 언젠데."
"……그러니까. 괜히 끊으라고 했나 봐."
"얼씨구?"
그렇게 열렬히 먼저 죽지 말라며 끊으라고 했던게 누군데. 이제 와서 딴 소리다.
"형 차에서 담배 폈으면 진짜 섹시했을 텐데."
신호 대기 걸린 틈에 어느새 바짝 다가와 눈까지 초롱초롱 빛낸다. 이찬희, 안전벨트 안하지? 다니엘이 씁, 하고 눈치를 줬다. 착실히 그 말을 들은 찬희가 기어 위에 놓인 다니엘의 손을 빤히 관찰한다. 얇고 긴 손가락은 마디마다 조금씩 뼈가 툭, 튀어나와서 단단하고 곧았다. 그 늘씬한 손가락 사이로 다니엘과 어울리는 긴 담배 하나가 걸려있는 걸 생각하니 좀 섹시하긴 섹시했다. 후우, 하고 연기를 내뱉는 것도 좀 섹시할 거다. 입술이 입술이다보니. 다니엘도 은근히 속눈썹이 길어서 내리깔면 촘촘히 내려앉는 것도 좋았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다니엘이 어깃장을 놓는다. 칫, 이상한 생각 아닌데.
"기껏 끊어놨더니 그런 소리나 하고."
"아, 내가 그 땐 어려서 그걸 몰랐어……."
"그래서, 다시 펴?"
"히, 아니."
하지만 어느 다니엘이 더 좋냐고 물으면 단연 '자신의 말을 들어준' 다니엘이다. 다니엘이 담배 피는 섹시한 모습을 감상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말 그대로 그건 좀 아쉬울 뿐이니까. 자신에게는 다니엘과 함께하는 시간 쪽이 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금연의 이유가 자신. 찬희는 그것이 못 견디게 뿌듯할 때가 있었다. 다니엘도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그 증거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형, 기특하니까 찬희가 선물로 뽀뽀해줄까요?"
"내리자."
한껏 귀여운 표정으로 상큼하게 입술을 내밀었더니 단박에 다니엘의 냉정한 말이 돌아온다. 아, 너무해! 찬희가 땡깡을 부려봐도 소용없다. 자자, 이찬희씨 내리세요, 아니면 여기서 잘래? 진짜 두고 내릴 기세에 찬희가 쳇…… 하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안다니엘 바보. 그래봤자 집에는 또 둘 뿐인데.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다니엘과는 평생을 함께 할 거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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