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녤천] no problem
새벽에 비가내린 뒤 많이 추워질거라고 들었으나 낮에는 햇빛이 강해 딱히 기온이 반토막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자 봄에 입었던 얇은 자켓만으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워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바람까지 불어서 찬희는 어쩔 수 없이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학교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서 죽치고 있어야 했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하필 복학하자 마자 악랄한 교수한테 걸려버려서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친절한 조원들의 도움으로 다른 수업 족보까지 몇개 얻을 수 있어서 전과목이 다 털리는것 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조별 프로젝트도 사실 찬희가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자료수집이라고 해봤자 인터넷 서핑으로 얻은 링크들을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후배 여자애한테 보내준게 다였다. 머리는 비었지만 양심은 있었던지라 찬희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조원들에게 술을 쏘기로 했다.
군대가기 전에 얼굴 몇번 본게 다라 이름도 처음들었던 것 같은 같은학번 동기 하나는 오전수업만 하나라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온다고 했고, 둘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후배 여자애 하나가 마지막 전공시험이 하필 7시에 시작이라 술약속은 9시에 잡혔다. 오후에 마지막 시험이 끝나서 존나 할일이 없었던 찬희만 시간이 붕 떠 과방과 캠퍼스를 배회하다 일찌감치 약속장소 근처에 나와 있었다. 8시가 되자 7시에 전공시험을 친다던 미애가 찬희선배 어디냐는 카톡을 했고, 몇분 후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을 한 채 카페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얘도 오늘 날씨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지 여름 원피스에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친채라 매우 추워보였다.
"오픈북인데 책 봐도 모르겠더라구요"
전공이 다 그렇다. 찬희는 위로차 본인이 망친 시험에 대해 줄줄이 늘어놨는데, 미애도 지기 싫었는지 1학기 성적까지 죄 까발리는 바람에 8시 반쯤 동기인 진혁이가 도착했을 때엔 카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미애와 천하제일 불행대회를 겨루고 있었다. 따로따로 저녁식사 약속이 있던 서진이와 선규는 술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셋은 십여분정도 더 앉아서 교수님들 험담을 주고받은 다음 분침이 숫자 9를 조금 지났을 쯤 천천히 카페 밖으로 나왔다. 정말 더럽게 추웠다.
막 중간고사가 끝난 대학가답게 거리는 우르르 몰려나온 대학생들과 앞다투어 호객행위를 벌이는 상점들로 왁자했다. 바로 옆에서 어느정도 큰 소리로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정도라, 셋은 거의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를 해야 했다. 찬희가 선택한 술집은 룸 형식으로 된 술집이었다. 여름방학 중에 생긴 모양으로, 2층으로 되어 좌석수가 많은데다 안주가 맛있다고 오픈한지 얼마 안되어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오늘같은 날 자리가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가보기나 하자는 식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행히 술집 영업시간으로는 초저녁이라 자리가 많았다. 2층 창가에 위치한 룸을 골랐으나 어차피 거리가 너무 시끄러워 창문은 열지도 못했다. 매니저 명찰을 단 키 큰 사내가 룸으로 안내해줬고, 문이 닫히자 마자 찬희 옆에 앉은 미애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우와, 여기 매니저 진짜 잘생겼다. 모델하다 온거 아냐? 봤어요? 유니폼 핏도 죽여 죽여."
"야, 너는 나 옆에두고 다른 남자 잘생겼다는 소리가 나오냐?"
찬희의 말에 미애가 인상을 팍 찌푸린다.
"아 오빤 나보다 예쁘잖아요. 같이다니기도 쪽팔린데 무슨소리야 진짜."
"뭐, 쪽팔려?"
미애한테 백번 공감을 하는지 옆옆의 서진이가 미애를 거들었다.
"풀메가 쌩얼에 꿀리는데 그럼 안쪽팔려요? 오빠는 인간적으로 여자랑 있을땐 얼굴 다 가려야돼. 매너가 없다니까."
"얼굴 가린다고 내 잘생김이 가려지겠냐."
"말을 말아야지, 하여튼 여기 매니저 보러 자주 와야겠다. 완전 내스타일이야."
그러고는 또, 여친 있을까? 번호따고싶다. 라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보다못한 찬희가 메뉴를 다 정하고 벨을 누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내가 대신 물어봐줘?"
"네? 아, 저기, 그러니까...."
술 마시기도 전에 얼굴이 빨개진 미애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 매니저였다. 안다니엘, 이름 특이하네. 찬희는 주문하시겠냐는 그의 말을 자르며 다짜고짜 물었다.
"매니저님, 여친 있어요?"
"네?"
갑작스런 물음에 그는 당황한 듯 했다. 찬희는 미애가 옆구리를 푹 찌르는 것을 무시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여친 있어요 없어요? 다시 묻자,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아, 없는데요..."
"진짜요? 와, 잘됐네."
옆에선 서진이와 미애가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진혁이와 선규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말없이 미소를 띈 채 관전하고 있었다. 찬희는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켠 뒤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번호좀 찍어줄래요?"
"아....."
이제 볼까지 발갛다. 그는 큰 눈을 굴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힐끔힐끔 보다가 결국 찬희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제 번호를 찍었다. 긴장했는지 도톰한 입술이 조금 오므라든 모습이 어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였더라, 망둥어? 확실히 찬희의 기준에 차는것은 아니지만 못생긴건 아니었다. 단정한 검은 머리칼 아래로 살짝 끝이 치켜올라간 눈은 사슴마냥 동그랗고 크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은 미애 말마따나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가늘고 길었다. 여친이 없다고? 신기하네. 뭐 나도 없으니까 할말은 없지만. 핸드폰을 돌려받은 찬희가 전화를 걸자, 그의 주머니 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이상한 번호 찍어준건 아니네. 찬희는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방긋 웃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좀 울상이 되었는데, 다른 표정을 숨기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연락 해도 되죠?"
"네, 네 그럼요."
그는 주문을 받고 허겁지겁 룸을 나갔다.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귀는 새빨개져 있었다.
"야, 너네쪽 힐끔거리는 거 봤어? 이거 서진이 찍었는데 미애가 전화걸어서 실망하는거 아냐?"
"밑져야 본전이죠! 혹시모르니까 선배, 그 번호 서진이는 알려주지 마요."
"야, 나 남친 있거든?"
"저사람이 사귀자고 하면 어쩔 건데?"
"차야지."
"진짜? 찰거야?"
"남친을 찬다고."
야 박서진 그렇게 안봤는데 완전 못됐다. 진혁이가 으아 웃어버렸다. 찬희는 그의 번호를 미애에게 알려준 뒤, 제 핸드폰에는 저장하지 않고 곧 중간고사에 대해 떠드느라 그에 대한 것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
아, 어떡해. 다니엘은 카운터로 돌아오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대박. 어떻게 그런 미인한테 번호를 따였지? 장하다, 안다니엘! 나름대로 너무 좋아하는 티는 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알바생 하나가 지나가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형 무슨 좋은일 있어요? 입이 귀에 걸렸네."
"야, 뭐. 좋은 일은. 그냥..... 있어 그런거."
다니엘은 손사래를 쳤지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기야 아직 사귀자고 한것도 아니고 번호만 받아간건데, 언제 연락을 다시 할지도 모르겠고.... 그치만 호감이 있다는 거니까 가능성은 80% 이상이지 않을까? 아까 내 폰으로 전화 걸어서 그사람 번호도 찍혔긴 한데, 먼저 연락하면 안되겠지.... 근데 진짜 예쁘다. 다니엘은 결국 첫 데이트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까지 생각하다가 가게로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확짝 웃으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태도가 지나치게 밝았는지 뒤쪽에 있던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같이 온 사람들이 좋은 친구들인 것 같다. 특히 같은 남자들은 게이라고 하면 피하기부터 할텐데. 여자 두명은 뒤에서 응원까지 해주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자리에서 너무 들뜬 내색을 못했다. 놀리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벌칙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 눈치를 좀 봤는데, 다들 그런 기색은 없었다. 보통 벌칙이거나 하면 표정에 장난기가 다 드러나니까. 하지만 그는 너무 자연스러웠고 주변 사람들은 조금 들뜬 표정일 뿐 웃겨서 죽으려 하지는 않았다. 좋아. 이건 그린라이트, 그린라이트다.
빨개진 볼이 좀 가라앉고 마음도 좀 다잡은 다음엔 알바가 서빙하려는 것을 말리고 일부러 그 룸은 다니엘이 도맡았다. 매니저 권한으로 안주 서비스도 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참았다. 맥주 추가주문을 받으러 들어갔을 때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몇 살이에요?"
"스, 스물넷요."
"아, 내가 형이네. 나는 스물 다섯. 여기 미애는 스물 하나... 맞지?"
연상이다! 연상 좋아! 다니엘은 더욱 들떴다. 옆에 여자애가 뭐라고 말한 것 같지만 다니엘에겐 들리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야 이찬희, 나 칵테일소주 시켜도 되냐?"
"어, 나도 마실래. 시켜 시켜."
이찬희, 이름도 예쁘다. 공손히 메뉴판을 받아들고 나온 다니엘은 곧바로 핸드폰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가려고 했는지 그들은 열한시가 되기 전에 룸을 나섰다. 네명을 먼저 내보낸 그가 카드를 꺼내 카운터의 다니엘에게 내밀었다. 심지어는 카드를 끼운 손가락까지 예뻤다.
"여기 안주 진짜 맛있네요. 자주 올게요."
"감사합니다. 저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적당히 취한 그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실실대고 웃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까전에 번호를 준 일도 지금 그가 다니엘의 앞에 있는 것도 모두 꿈 같았다. 왜인지 그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다니엘은 곁눈질로 그를 힐끔거리며 간신히 인사했다. 그는 그 큰 눈을 깜박거리며 잠시간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내밀어진 영수증과 카드 중에 카드만 달랑 집어들고는 휘적휘적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뒷모습이 위태해보여 달려가 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다니엘은 꾹꾹 억눌러야 했다. 번호좀 줬다고 너무 친한척 하면 부담스럽겠지? 흑심 있는거 너무 대놓고 티내면 좀 그런가?
생각을 하다가 다니엘은 자동문 버튼을 찾지 못하고 유리문 바로 앞에서 휘적거리는 그를 보고 후다닥 달려갔다. 사람이 이렇게 예쁘고 귀여워도 되나. 치를 떨면서. 다니엘은 자동문 버튼을 누르려다가, 결국 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저... 연락, 주시는거죠?"
그는 자신보다 큰 다니엘을 멀뚱히 올려다보다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또 해사하게 웃는다.
"아 그럼요. 완전 빠졌는데."
.........맙소사.
다니엘은 입을 헤벌린 채 버튼을 눌렀고, 문이 열리자 그는 다니엘에게 감사하다며 꾸뻑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나섰다. 다니엘은 한참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 살아있길 잘한 것 같아. 인생에 감사하며.
*
"야 미애야, 너 빨리 전화해야겠다. 완전 기대하고있는데?"
"정말요? 아 어떡해. 내일 전화할까?"
"내가 너 완전 빠졌다고 했거든."
"아 그런말은 뭐하러 해요!"
*
그리고 다음날 여자애의 전화를 받은 다니엘은 죄송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는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end?-
외전같은게 있을지도ㅎㅅㅎ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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