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녤천] Fucking Christmas 2015
크리스마스같은 거, 엿이나 먹으라지.
찬희는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볼을 크게 부풀렸다. 사실 뜨거운건 왼쪽뺨 뿐이다. 그래서 잠시 뒤 찬희는 오른손등을 미지근해진 왼손바닥 대신 왼뺨에 올렸다. 아따따거, 저절로 비명이 나온다. 상처가 난것 같지는 않는데 쓰라려서 죽을 것 같다. 마음이 더 아파야 할 것 같지만 타는듯한 실제적인 고통에 정신적 충격 따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크게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자업자득이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씨발, 어떻게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아마 반경 100m내에 있던 사람들은 다 찬희쪽을 쳐다봤을 것이다. 연희가 너무 세게 찬희의 뺨을 올려붙여서 좀 불쌍하게 보였는지 은영이는 다행히도 다른쪽 뺨을 치는 대신 복부를 하이힐 굽으로 차버렸다. 그것도 물론 아팠으나 양쪽 뺨을 교대로 맞아 볼거리 온 아이마냥 부어있느니 걷어채이는게 나았다. 그리고 왼쪽을 두번 맞았으면 아마 이가 나갔을 것이다. 아. 너무 아파. 찬희는 결국 찔끔 눈물을 흘렸다.
대로에는 연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작은 틈을 징글벨이 비집고들어 북적북적 한데 찬희만 홀로 어두운 골목 안에 주저앉아 있으니 서럽기 그지없다.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걸 들키다니. 최악이야. 앞으로 몇달은 더 버틸 자신이 있었는데. 찬희는 입 안으로 구시렁거리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를 숙이니 머리로 피가 몰려 눈가가 뜨거워지며 핑 돌았던 눈물이 더욱 차오른다. 하느님, 제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아니 물론 잘못한건 맞는데.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너무하잖아.
"어엉...."
결국 서러움과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연희와 은영이가 봤다면 뭘 잘했다고 쳐 우냐고 더 팼을 테지만 여기는 찬희 혼자뿐이다. 그래서 사양 않고 엉엉 울었는데,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찬희는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찬희가 쪼그려앉은 층계 앞에 서서 찬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한 남자랑 눈이 마주쳤다. 길쭉한 남자였다. 모델인가? 키가 크고 마른데다 롱코트를 입어서 그런지, 역광진 모습이 마치 땅에 꽂힌 젓가락같다. 찬희가 울다말고 눈을 깜박이자, 그도 따라서 눈을 깜박였다. 사슴처럼 큰 눈이다. 약간 오므리고 있는 입술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도톰했는데, 딱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이국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왜 거기 서서 사람 우는거 빤히 쳐다보고 지랄이야 쪽팔리게.
"뭘 봐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뺨맞고 우는사람 처음 봐요?"
찬희가 대놓고 빨리 꺼지라는 듯이 말했는데도 그는 당황하거나 머쓱해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 없이 찬희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가, 찬희의 한쪽 눈이 서서히 찌그러지며 가늘어지자 그제야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른다.
"네. 크리스마스 이브에 뺨맞고 우는데 예쁜사람은 처음 봐서요."
......정신병잔가?
찬희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엮이면 피곤해질것 같고. 여기 더 앉아있으면 엮일 것 같아서 찬희는 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빨리 이자리를 피하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가 불쑥 찬희의 진행방향 쪽으로 몸을 디밀어 찬희를 가로막았다. 아 씨발. 찬희는 기겁하며 한걸음 물러서고, 그를 노려본다.
"이름이 뭐예요?"
"......네?"
"저는 안다니엘이라고 하는데.... 아, 그냥 니엘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니, 저기요."
댁 이름 궁금하지도 않고 내 이름 알려줄 생각도 없는데. 찬희는 확 짜증이 나서 뭐라고 쏘아붙이려고 하다가, 더 말을 섞기도 싫어 피해갈 생각에 옆으로 한걸음 움직였다. 그랬더니 다니엘도 빠르게 움직여 찬희를 다시 막아선다. 육성으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찬희가 간신히 참아냈다. 아니 근데 왜 욕하면 안되지? 존나 좆같은데. 찬희가 노려보는데도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일말의 미안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뻔뻔한 쌍판에 찬희는 순간 아연해졌다. 잘못 걸렸다.
"이름 알려주면 비켜줄게요."
찬희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시비는 피하는 것이 좋다. 다른 아무 이름이나 내 이름이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딱히 생각나는 이름도 없고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면 다신 볼 일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찬희는 그냥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이찬희요."
"이찬희? 와, 이름도 예쁘네요."
"....안 비켜요?"
"아,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다니엘은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찬희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나쁜 예감은 왜 틀리질 않는걸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찬희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인적 없는 골목길에는 멀리서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배경음으로 한 발자국 소리 두 개만이 날카롭게 울린다. 찬희의 걸음이 더 빨라졌지만 쫓는 걸음은 느긋했다. 그 성큼성큼한 걸음소리가 찬희에게는 정말 무섭게 들렸다. 대로, 대로변으로 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쫓기는 공포 때문이었는지 찬희는 길을 잘못 들었고, 방향을 잃어버렸다. 골목 모퉁이를 다섯개쯤 돌고 급기야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찬희는 받친 공포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팩 뒤돌아서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은 정말 지척에서 멈춰섰다.
"왜 자꾸 따라와요!"
찬희의 비명같은 외침에 다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뭐 그리 당연한걸 묻냐는 투로 말한다.
"찬희씨같은 예쁜 사람은 밤길 혼자다니면 위험해요. 이상한 사람 꼬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이미 꼬였는데. 찬희가 울것같은 표정으로 입을 비죽이자 다니엘의 눈썹이 축 처졌다.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듯한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아 존나 짜증나!
"이상한 사람이라니."
"이를테면...."
"이를테면?"
"저 같은?"
본인도 알잖아! 찬희의 입이 헤벌어졌다. 다니엘은 본인 스스로 이상한 사람임을 표방하고 있는 주제에 찬희가 경계심을 풀길 바라는 건지, 코트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갑까지 꺼내들었다.
"그래도 저 신원 확실한 사람이예요. 자요. 주민등록증 볼래요?"
주민등록증은 범죄자새끼들도 다 갖고 있어요. 라고 하고싶은 것을 삼키며 찬희는 그가 내미는 민증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이름이 굉장히 특이하다. 성탄절 전야에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지만. 안다니엘.... 94면 나보다 어리네. 뭐야, 도곡동 타워팰리스? 주소를 훑다 팍 찌그러진 찬희의 표정을 본 그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찬희의 표정을 잘못 읽은듯 싶었다.
"아, 저 부모님이랑 같이 안살아요. 그거 제 명의예요."
"돈 졸라 많나보네."
"좀 그렇죠."
부자들은 다 정신병자여야만 하는가. 찬희는 재수없다는 말 외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왜 여기서 이 정신병자랑 이러고 있는거야. 추워 죽겠네. 거기다 다니엘한테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는데 아직도 볼이 얼얼한 중이다.
"돈 많으면 이렇게 이상한짓 하고 다녀도 돼요? 처음보는 사람 막 쫓아다니고?"
"네."
"......"
한대 칠뻔했다. 대신 찬희는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내 GPS를 켰다. 생각보다 대로가 멀지 않아서, 대충 방향을 가늠한 찬희는 다니엘을 무시하기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이번엔 쫓아오는 데 그치지 않고 찬희의 옆에서 함께 걸으며 뚱한 찬희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아 거 진짜 성가시네.
"그만 봐요 닳으니까."
"찬희씨 저랑 사귈래요?"
"아 씨발 쫌!"
결국 욕이 나왔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를 악문채 골목 한켠에 우뚝 선 찬희를, 다니엘은 대답을 기다리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본다. 후, 하. 후, 후우, 후우우.... 몇 번 심호흡을 한 찬희는 간신히 들끓는 화를 가라앉히고 다니엘에게 말했다.
"저기, 주위에서 정신병원 가보라고 얘기 안 해요?"
"갔었는데, 의사가 저는 예의바른 정신병자라 딱히 해롭지는 않아서 입원할 정도는 아니래요."
"지금 저한테 많이 해롭고 있는데."
"저 찬희씨 때린적 없는데."
"정신적으로 많이 쳐맞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저랑 사귈래요?"
"싫어요."
"아..." 다니엘이 울상을 짓는다. 머리카락도 부스스해서 꼭 축 쳐진 대형견 같은 모습에 찬희는 조금 마음이 흔들릴 뻔 했지만 아무리 돈많고 매력적이어도 정신병자는 안된다. 아, 안되고말고. 그런데 그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안되는데....."
"......뭐가요."
"저 너무 찬희씨랑 사귀고 싶은데 찬희씨가 거절하니까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긴 뭘 어째요 그냥 포기하고 각자 갈길 가면 되지.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오늘 처음본 사람이랑, 그것도 남자랑! 사귀어야 하는데요?"
"찬희씨 너무 예뻐서요."
"그건 댁 사정이고."
"큰일이네."
찬희의 거절에 다니엘은 안절부절 못했다.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가 손을 꼼지락대다가 한숨을 푹 쉬다가. 꼴이 가관이라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찬희는 한시라도 빨리 이 돈많은 정신병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찬희는 다시 가던 길을 가려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팔이 잡혔다. 고개만 돌려 뒤를 보자, 다니엘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찬희를 보고 있었다.
"찬희씨, 미안해요."
"미안하면 이것 좀 놓...."
"납치좀 할게요."
다니엘의 오른손이 어깨 위로 올라가는 것 까지만 봤다. 다음 순간 뒷목에 둔탁하고도 날카로운 충격이 와 닿았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마지막으로 찬희가 생각한 것은 좆됐다는 거였다.
*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찬희는 곧 자신이 전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침대 위였다. 아 미친, 씨발! 씨발!! 욕지기를 하며 옷이 어디있나 찾으려고 침대에서 허겁지겁 내려서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찬희는 다시 침대 위로 다이빙하며 시트로 미친듯이 몸을 둘둘 감았다. 눈물이 절로 나와서, 쪽팔리게도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를 빽 질러야 했다.
"야이 개새끼야!"
"아, 걱정 마세요 강간은 안했으니까."
"내 옷 내놔! 집에 보내줘!"
시트에 얼굴을 파묻으며 엉엉 우는 찬희의 곁에 앉은 다니엘이 시트 위로 찬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찬희가 억울한 듯 시트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해, 해롭지 않다면서!"
"그러게요. 아, 여태까진 해를 끼치면서까지 갖고싶었던게 없었던것 같아요. 제가 거절당해본 적이 없어서."
고작 그딴 이유라니, 어처구니가 없기로는 연말시상감이다. 올해의 또라이상 드려요. 씨발. 고소할거야. 찬희는 목이 메여 꺽꺽 소리가 날 때까지 울었고 다니엘은 그 옆에서 찬희가 울음을 그칠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찬희의 울음이 잦아들자, 다니엘이 찬희의 머리만 나오도록 시트를 벗겨냈다. 찬희는 결단코 목 아래로는 내리게 두지 않겠다는 듯 시트를 꼭 부여잡고 울어서 새빨개진 눈을 부릅뜬 채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토끼같다. 진짜 귀여워. 섹스하고 싶어요."
"미친새끼야!"
"칭찬 고마워요. 그래서, 저랑 얌전히 사귈래요 계속 거절하면서 사귈래요?"
"안 사귄다고 씨발!"
또 신경질을 내며 어엉, 울음을 터트리는 찬희의 볼을 다니엘이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조심 쓸었다. 굵게 방울진 눈물이 다니엘의 손등을 타고 도륵도륵 굴러내린다. 다니엘이 웃으며 찬희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입술이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닿는 느낌이 굉장히 묘했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희는 기분이 나빠야 했기 때문에, 눈을 새파랗게 부라리며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재수없게도 매우 행복해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엿 먹어!"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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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할로윈웹진 니엘이랑 좀 캐릭터가 겹치긴 하는거같은데ㅎㅅㅎ 좀더 또라이인...... 니엘이가 보고싶었다 미안하다 찬희야
행복하렴....... (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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